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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평화신문][교구 종합]「목동성당 박해와 성직자 순교약사」 발간(2007년 10월 28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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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내포교회사연구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541회   작성일Date 22-09-01 14:10

    본문

    [교구 종합]「목동성당 박해와 성직자 순교약사」 발간

    2007.10.21 발행 [9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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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교구 목동본당(주임 우영성 신부)은 6ㆍ25 전쟁 중 목동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순교한 성직자들의 순교정신과 발자취를 기리고자 「목동성당 박해와 성직자 순교약사」를 최근 발간 봉헌했다.


    목동 수도원에서 순교한 성직자는 대전교구 사제 8명과 강만수(당시 대전교구 홍성본당 주임) 신부를 돕다가 체포된 평신도 1명, 광주대교구장 안 브레난 주교, 광주대교구 사제 2명 등 총 12명에 이른다.


    목동성당 순교사가 발간되기는 1999년 「목동성당 80년사」, 2000년 「순교약사」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그간 약사는 교회 자료만을 중심으로 편찬이 이뤄졌지만 이번에는 대전교구사연구소(소장 김정환 신부)의 도움으로 교회 자료를 보완하고 정부 사료, 당시 시신을 수습한 이들의 증언을 보완함으로써 학살 장소는 물론 시신이 버려지거나 생매장된 우물터 등이 확인돼 기초사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목동 순교자들은 당시 금사리본당 주임이던 몰리마르 신부만이 수단을 입고 목이 잘린 채로 유해가 발견됐을 뿐 다른 순교자들은 시신을 찾지 못했다. 이들은 총 1559위에 이르는 피해자들과 함께 화장돼 학살장소 인근에 매장됐다가 1996년 보문산 사정공원 애국지사총에 이장돼 현재에 이른다.


    약사에 따르면, 목동 수도원과 인근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이유는 근처에 대전교도소가 자리해 수용이 쉬웠고 유엔군이 성당을 폭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목동성당이 북한군 정치보위부 건물로 쓰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성직자들은 "저희가 성당과 신자들을 두고 어디로 떠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북한군에게 체포되는 것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목동본당은 앞으로 해마다 이들이 순교한 날로 추정되는 9월 26일에 추모행사를 갖기로 했으며, 대전교구사연구소와 함께 조사작업을 진행키로 했다. 아울러 목동본당 순교사 관련 자료 수집과 보완에 신자들이 더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다.


    우영성 주임신부는 "이 책을 통해 신자들이 순교의 얼을 이어받아 신앙을 되돌아 보고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당시 순교자들을 재조명하고 그분들을 기리는 일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목동성당 순교자 명단.

    ▲대전교구 사제(8명, 한국인 1명, 파리외방전교회 7명)=코르데스 공 마리오(당시 당진본당 주임)ㆍ페랭 백문필(합덕 주임)ㆍ강만수(홍성 주임)ㆍ콜랭 고일랑(서산 주임)ㆍ를뢰 노베드로(온양 주임)ㆍ리샤르 이동헌(예산 주임)ㆍ몰리마르 모리말(금사리 주임)ㆍ폴리 심응영(천안 주임) 신부

    ▲광주대교구 사제(3명, 골롬반외방선교회)=안 브렌난(광주대목구장) 주교, 고도마(목포 주임)ㆍ오요한(목포 본당 보좌) 신부

    ▲평신도(1명)=이항진(토마스)

    정완영 명예기자 0espress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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