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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신문]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제1회 학술세미나(2011년 10월 9일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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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내포교회사연구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06회   작성일Date 23-03-12 22:29

    본문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제1회 학술세미나 

    “‘수로 교통의 요지’로 복음화 구심점 역할 담당”

    조선시대 교류 중심지로 천주교 사상 전파에 한몫

    순교자 묘도 문중서 관리

    발행일 2011-10-09 [제2765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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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는 9월 28일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에 발맞춰 제1회 학술세미나를 개최, 성지에 대한 다양한 학술적 연구의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청양 다락골성지(전담 이의철 신부)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다락골성지가 9월 28일 성지 내 대성당에서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에 발맞춰 ‘제1회 청양 다락골성지 학술세미나’를 열고 성지와 관련한 다양한 학술적 연구 결과를 나누는 장을 마련한 것.


    이날 세미나에서는 김성태 신부(신리성지·본당 주임)가 ‘청양지역의 복음 전파와 다락골 교우촌’을,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가 ‘다락골 줄무덤의 학술적 검토’를, 김수태 교수(충남대 국사학과)가 ‘최경환 가문의 신앙 수용과 삶’을 주제로 주제발표를 했고, 차기진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장), 김진소 신부(호남천주교회사연구소장), 서종태 교수(전주대학교) 등이 각각 토론자로 나섰다.


    김성태 신부는 “최양업의 선대에서 다락골로 이주해 온 것은 이미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던 교우공동체의 역할이 컸다”며 “다락골과 청양지역이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된 요인을 찾아보면, 지리적으로 홍주, 청양, 정산, 보령의 여러 주현들과 홍주진관 및 공주진관이 서로 접계를 이룬 곳이라는 점과 산지 지형에서 발원하는 여러 물길들이 모여 금강에 합류하거나 무한천을 이뤄 아산만까지 이르는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는 점, 내포지역 15개 속역을 거느린 금정도 본역이 화성에 있었다는 점 등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이자 교류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으며,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학이나 천주교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적인 성향의 사림들이 많았으며 결정적으로 기호남인 문하에서 수학한 이존창 같은 인물이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고, 다락골의 지리적 특성을 통해 역인 및 역졸 등 역과 관련된 신자들이 많았다는 점이 복음전파 활성화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환 신부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순교자들의 시신은 한국의 전통과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의 마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옮겨져 안장됐으며, 묘지 조성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면서도 구분을 뒀는데, 문중과 항렬에 따른 예를 지키면서도 순교자의 묘는 표시가 나도록 했다”며 “순교자의 묘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무덤이 혼재돼 있는 다락골 줄무덤은 현재 제1줄 무덤에 14기, 2줄 무덤에 10기, 3줄 무덤에 13기 등 ‘무명 순교자들의 묘’라고 표시된 묘들이 있고, 이들 중 실제 순교자들의 무덤이라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제1줄의 14기이며 이들 무덤은 문중 안에서 순교자의 묘로 구전되며 관리돼왔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세미나에서는 최양업 신부 편지를 중심으로 한 최경환 가문의 신앙과 이에 따른 성지의 의미를 되새기는 구체적인 연구가 소개됐다.


    김수태 교수는 “초기 한국교회 순교사에 대한 정리와 관련된 최양업 신부의 활동은 단순히 「기해·병오박해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데 그치지 않고, 조선에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나름대로 초기 한국교회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김 신부는 또 “무엇보다 최양업 신부는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수집과 정리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그의 서한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특히 자기 가문의 순교사에 대한 정리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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