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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신문][현대 순교록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찾아'] 2.그들은 순교자였다(2007년 6월 17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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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내포교회사연구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391회   작성일Date 22-06-13 17:43

    본문

    [현대 순교록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찾아'] 2.그들은 순교자였다
    발행일2007-06-17 [제2554호]

    “목자가 양떼를 버리고 갈 순 없지요”

    피난 설득 거절하고 성당 지키다 순교

    공산당원, 성경 불태우고 흉기로 살해

    [전문] 6.25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신자들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박해를 받았고 박해의 이유가 신앙 혹은 교회 직무상 때문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그동안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은 전쟁의 와중에 여느 민간인 사망자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희생자일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돼 왔었다.

    한국전쟁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그들이 순교자였는지 혹은 희생자였을 뿐인지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그들은 과연 순교자였을까.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대전교구 공세리본당 복사였던 김윤배(방그라시오.67)씨의 증언과 대전교구가 최근 내놓은 자료집 ‘한국전쟁과 현대의 순교자들’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현한다.

    1950년 3월 대전교구 공세리본당

    열 살 윤배는 아침 일찍 성당에 왔다. 새 신부님이 오시는 날이다.

    먼지를 풀풀 풍기는 트럭 한 대가 언덕 너머로 보였다. 뷜토 오(한국명 오필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이었다. 신부님은 성당에 도착하자마자 트럭에서 짐을 내렸다. 대부분 약이었다. 신부님의 키가 너무 커서 한참을 위로 올려봐야 했다. 발은 또 왜 그리 크신지. 어디서 구하셨는지 얼개빗으로 가슴까지 흘러내린 수염을 빗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신부님은 도착한 날부터 병든 주민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소문이 퍼져 온양, 예산, 천안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쟁이 나기 3개월 전이었다.

    7월. 공산군이 평택까지 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늘 위 비행기는 미군 것인지 공산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산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지만 성당에서는 미사가 봉헌됐다. 이날 미사 복사였던 윤배는 제대 뒷정리를 마친 후 사제관으로 향했다. 2층 사제관 앞에서 김사천 본당회장과 신자 몇 명이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부님 피난 가셔야죠.”

    “예 가야죠. 근데 신자들이 안 가면 난 갈 수 없어요. 목자가 양을 두고 갈 수 없지요.”

    신부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 언덕에 말 탄 공산군이 보였다. 공포탄을 쏘며 성당에 난입한 그들은 신부님부터 체포했다. 사제관은 정치보위부 사무실이 돼 버렸다. 그들은 성당 기물을 모두 부수고 사제관에 있던 성경과 책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기관총으로 위협하는 그들을 누구도 가로 막지 못했다. 그 후 신부님을 본 신자는 아무도 없었다.

    뷜토 오 신부는 서울, 평양, 만포진, 고산진, 초산진 등을 거치는 죽음의 행진 끝에 1951년 1월 6일 목숨을 잃었다. 영하 40도 추위에 땅을 팔 수 없어 동료들은 오신부의 시신을 눈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1950년 8월 대전교구 공주본당

    성당 지하에는 홍성본당 주임 강만수 신부와 이항진(토마스)씨가 구금돼 있었다. 사실 강신부는 충분히 피난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성당으로 향하다 공산군에 체포된 것이다.

    6월 중순 성당 신축 문제를 상의하고자 대전에 있던 강만수 신부는 전쟁이 나면서 홍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강신부는 대전에서 육군 상사인 동생 강경수(요한)를 만났다. 동생은 자기 차로 피난하자고 설득했지만 강신부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너는 군인으로서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이미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홍성으로 떠난 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강신부는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길을 북으로 옮겼다. 강신부는 공주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자 공주본당 신자 집에 머물며 은밀히 성무활동을 펼쳤다. 공주 지리를 잘 알고 있던 이항진(토마스)씨가 힘을 보탰다. 하지만 8월 중순 공산군에게 체포됐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대전 목동 수도원으로 이송됐다. 공주에서 잡힌 사람들을 태운 트럭이 목동수도원으로 향할 때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지만 강신부와 이항진씨는 탈출하지 않았다. 그들을 면회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둘은 평화롭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50년 9월 23~27일 사이 목동수도원 포로 학살 때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1950년 8월 대전교구 서산본당

    합덕에 피난 와 있던 백낙선(사도요한.서산본당 상홍리공소 회장)씨에게 서산본당 콜랭 고 신부님의 소식이 들려왔다. 피신을 애원하던 신자들을 달래며 성당을 지키던 신부님이 공산군에 의해 목동수도원으로 끌려갔다는 것. 백낙선씨는 성체와 성당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산으로 돌아왔다.

    수차례 공산당원들에게 체포됐다가 석방되기를 반복했던 백낙선씨는 결국 9월 12일 밤 11시께 음암면 도당리 일곱 거리로 끌려가 150여 명의 공산당원들이 휘두른 흉기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당시 백회장의 입을 못 쓰도록 흉기로 가격한 이유는 계속해서 ‘예수 마리아’를 되 뇌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2007년 4월 상홍리 백씨 문중 묘에 세워진 ‘백낙선 추모비’에서 인용)

    1950년 8월 대전교구 합덕본당

    전쟁이 일어나자 본당 신자들이 주임 페랭 백신부에게 피난을 권했다. 하지만 백신부는 죽음을 택했다. “전쟁 후 교회를 위해 보좌 신부님을 피난 보냈지만 나는 안가. 천안의 심신부, 논산의 공신부 등과 순교하기로 결정했어. 끝까지 교우들과 함께 있다가 순교할 수 있는 기회에 왜 가나? 천주께 감사해야지.”

    한 달 후인 성모승천대축일. 본당 주임 페랭 백신부는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주고 있었다. 인민군 세 명이 차를 타고 와서 군화를 신은 채 성당으로 들어왔다. 인민군은 ‘나를 쏘라’고 고함을 치던 백신부를 차에 태웠다. 본당 신부가 공산군에게 끌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본당회장 윤복수(레이몬드)씨와 복사 송상원(사도요한)씨가 차를 막았지만 결국 모두 잡혀갔다. 윤복수씨와 송상원씨는 결국 당진성당 근처 내무서 마당에서 처형됐고 백신부는 9월 23~27일 사이 목동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순교자 정신 기리고 본받자”

    ■대전교구 교구사 편찬위원회 김윤배 위원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갈 순 없지요.’

    한국전쟁 당시 공세리본당 복사였던 김윤배(방그라시오)씨는 아직도 뷜토 오 신부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고 전한다.

    “그분들은 분명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어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들의 순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대구대교구청에서 일하던 김씨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1969년. 택시운전을 시작한 김씨는 그 때부터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씨의 집 거실 한쪽 면을 가득 채운 교회사 관련 책들은 그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자신이 모셨던 뷜토 오 신부에서부터 교구 내 본당에서 순교한 신부와 신자들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증인들을 만나고 신부님의 행적을 찾는데 온 힘을 다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자료도 부족했고 교회의 관심은 더더욱 없었다. 외로운 시간이었다.

    김씨의 노력은 최근에 빛을 보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순교한 대전교구 성직자 사진과 약력, 증언들은 대전교구사연구소의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에 귀중한 연구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정작 양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들은 순교자였습니다. 그들의 정신을 올바로 알고 기리고 본받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사진설명

    ▶대전교구 합덕본당은 2005년 8월 14일 오전 10시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현지에서 경갑룡 주교 주례로 6.25 순교자 현양미사 및 평신도 순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한국전쟁 당시 공세리본당 복사였던 김윤배(방그라시오)씨는 아직도 뷜토 오 신부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고 전한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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