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현대 순교록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찾아'] 3.한국전쟁 순교자 연구의 성찰과 과제(2007년 6월 2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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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순교록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찾아'] 3.한국전쟁 순교자 연구의 성찰과 과제
발행일2007-06-24 [제2555호]
교회 관심·체계적 지원 필요하다
사료집·증언록 토대로 현양운동 전개해야
평신도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 활성화 시급
‘양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목자들 - 피 뿌려 가르치신 그 정신 받뜨자(받들자)!’
1950년 11월 10일자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의 전신)는 전쟁 발발 후 5개월 동안 공산군에 피살되거나 납치, 행방불명 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의 명단을 게재했다. 이들은 피난 기회가 있음에도 성당을 떠나지 않고 지키다 화를 당했다.
앞서 1950년 6월 26일 열린 서울대목구 긴급 교구 참사회에서는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 한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또 1952년 3월 대구 남산동 주교관에서 열린 연차 전국 교구장 회의는 ‘전쟁과 공산군 침입 시에 있어 복음과 교회 정신에 따라 본당신부는 관하(管下) 신자가 잔류하고 있는 한 주검(죽음)의 위험이 있더라도 그들과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더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희생된 계기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목숨이 경각에 처한 상황에서도 교회의 결정을 따르며 임지에 남은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를 따르다 목숨을 잃은 평신도들이 단순히 희생자가 아니라 순교자였음을 엿볼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1952년 6월 5일자 ‘천주교회보’는 ‘우리의 교회가 이번 적화로 인하여 받은 수난의 정도는 과거 기해, 병인년간의 군란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며 공산군의 탄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희생했음을 밝히고 있다. 전쟁 직후부터 최근까지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에 대한 관심은 지속돼 왔다. 특별히 본당 신부가 납치되거나 평신도들이 목숨을 잃은 본당에서는 개별적으로 현양행사를 가져왔다.
춘천교구 양양본당은 본당 3대주임으로 봉직하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기를 맞아 지난 2000년 순교기념관을 개관하고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수원교구 평택본당은 2003년 5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체포돼 9월 대전 목동 수도원에서 순교한 몰리마르(모리발 요셉.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의 유해 안장식을 가졌고, 대전교구 합덕본당도 지난 2005년, 한국전쟁 때 순교한 7대 본당 주임 페랭(백문필.파리외방전교회) 신부와 윤복수(레이문도) 총회장, 송상원(사도 요한) 복사를 위한 순교비를 세웠다.
전주교구에서는 비교적 활발한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가 진행됐다. ‘전주교구사’에는 남원·부안·상관·수류·장수·정읍·신태인본당 등에서 순교한 평신도들의 이름과 나이, 순교 상황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는 이처럼 본당 또는 교구별로 지속돼왔다. 하지만 꾸준히 진행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납치됐다 풀려난 생존자의 증언과 손에 꼽히는 자료만으로 조사된 내용이어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범 교회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의 관심과 물적.인적 지원이 필요하다.
전쟁당시 순교사실을 확인하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기초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기초로 사료집과 증언록을 제작해야 한다. 또 교구 또는 한국교회 전체가 나서 사료집과 증언록에 기초한 순교자 현양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증인들이 대부분 연로하고 자료 또한 전쟁 중 소실돼 어려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전쟁 순교자들이 공산군 점령지였던 서울과 춘천, 대전지역에서 주로 나왔고 순교 시기도 1950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는 것은 순교자 연구 작업을 이 시기, 지역에 맞춰 전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아울러 평신도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도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공산군이 후퇴한 후 주로 공산군 게릴라(빨치산)에 의해 자행된 탄압으로 희생된 평신도 순교자가 100여명에 달하는 전주교구의 경우를 볼 때 3개월 넘게 공산군이 점령했던 서울과 춘천, 대전지역 평신도 순교자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신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아 죽어간 사람들로 여긴 전주교구는 1961년 교구장 명의 공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우리 가톨릭은 다각도로 박해받았고 그 중에는 피살된 교우도 허다하여 실로 역사적인 수난이기도 하였습니다.(중략)… 이들의 거룩한 정신을 찾아 현양하고 신도들에게 순교정신을 앙양시키고자 함과(중략)…우선 살아있는 증인들의 기억이 생생할 때에 가능한 세밀히 조사하여 장차 이 조서가 중요한 의의를 지닐 때에 대비코자 하오니, 각 본당과 공소에 널리 알려 빠짐없는 조사 보고를 무망하나이다.’
46년 전 공문 내용을 거듭 이야기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되돌아보며, 이제라도 한국전쟁 순교자 현양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대전교구사연구소, 순교자 자료·증인 확보 나서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전교구 대전교구사연구소는 보다 정확한 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위해 한국전쟁 중 사망한 대전교구 지역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당시 행적을 증언해 줄 증인과 관련 자료 소장자들을 찾고 있다. 아래는 대전교구가 현재 조사 중인 순교 성직자와 평신도 명단. 교구사 연구소는 또 전쟁 당시 교구 내에서 벌어진 공산군의 탄압과 순교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찾고 있다.
※ 문의 및 제보 041-556-0166
[성명/직책/체포 날짜 및 순교경위]
·뷜토(오필도)(파리외방전교회)/공세리본당 주임/1950년 7월 성당에서. 1951년 1월 6일 중강진 하창리에서 사망.
·카다르(강달순)(파리외방전교회)/목동본당 겸 수도원 관리/1950년 8월. 1950년 12월 18일 중강진 하창리에서 사망.
·코르데스(공마리오)(파리외방전교회)/당진주임/1950년 8월 14일 이전.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페랭(백문필)(파리외방전교회)/합덕주임/1950년 8월 14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강만수/홍성주임/1950년 8월 15일 이후.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콜랭(고일랑)(파리외방전교회)/서산주임/1950년 8월 16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를뢰(노베드로)(파리외방전교회)/온양주임/1950년 8월 20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리샤르(이동헌)(파리외방전교회)/예산주임/1950년 8월 20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몰리마르(모리말)(파리외방전교회)/금사리주임1950년 8월 20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폴리(심응영)(파리외방전교회)/천안주임/1950년 8월 23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윤복수(레이문도)/합덕본당 총회장/1950년 8월 14일 본당주임 페랭신부와 함께 체포. 1950년 9월 29일 당진에서 사망
·송상원(사도요한)/합덕본당 복사/1950년 8월 14일 본당주임 페랭신부와 함께 체포. 1950년 9월 29일 당진에서 사망
·윤갑수(시몬)/예산본당 총회장/윤을수 신부의 형, 합덕본당 윤복수 회장의 사촌. 전쟁 발발 후 피난 중 마을 자유대에 체포. 1950년 9월 27일 총살
·최종수(요한)/공주본당 신자/1950년 7월 14일 전후. 성당에 난입한 공산군 만행 항의하다 성당 마당에서 총살
·이항진(토마스)/대전공업학교 수학교사/공주지역에서 성무활동을 하던 강만수 신부와 동행하다 1950년 8월 15일 전후 체포.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백낙선(사도요한)/서산본당 상홍리공소 회장/1950년 8월 4일 전후 체포
1950년 9월 12일 서산에서. 공산당 추종자들에 의해 피살
사진섬령
한국전쟁 당시 대전 목동수도원 인근 공터에서는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대전교구 성직자와 평신도를 비롯해 12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사진은 지난 1996년 현장에서 진행된 유골발굴 모습.
이승환 기자
발행일2007-06-24 [제2555호]
교회 관심·체계적 지원 필요하다
사료집·증언록 토대로 현양운동 전개해야
평신도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 활성화 시급
‘양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목자들 - 피 뿌려 가르치신 그 정신 받뜨자(받들자)!’
1950년 11월 10일자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의 전신)는 전쟁 발발 후 5개월 동안 공산군에 피살되거나 납치, 행방불명 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의 명단을 게재했다. 이들은 피난 기회가 있음에도 성당을 떠나지 않고 지키다 화를 당했다.
앞서 1950년 6월 26일 열린 서울대목구 긴급 교구 참사회에서는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 한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또 1952년 3월 대구 남산동 주교관에서 열린 연차 전국 교구장 회의는 ‘전쟁과 공산군 침입 시에 있어 복음과 교회 정신에 따라 본당신부는 관하(管下) 신자가 잔류하고 있는 한 주검(죽음)의 위험이 있더라도 그들과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더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희생된 계기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목숨이 경각에 처한 상황에서도 교회의 결정을 따르며 임지에 남은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를 따르다 목숨을 잃은 평신도들이 단순히 희생자가 아니라 순교자였음을 엿볼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1952년 6월 5일자 ‘천주교회보’는 ‘우리의 교회가 이번 적화로 인하여 받은 수난의 정도는 과거 기해, 병인년간의 군란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며 공산군의 탄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희생했음을 밝히고 있다. 전쟁 직후부터 최근까지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에 대한 관심은 지속돼 왔다. 특별히 본당 신부가 납치되거나 평신도들이 목숨을 잃은 본당에서는 개별적으로 현양행사를 가져왔다.
춘천교구 양양본당은 본당 3대주임으로 봉직하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기를 맞아 지난 2000년 순교기념관을 개관하고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수원교구 평택본당은 2003년 5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체포돼 9월 대전 목동 수도원에서 순교한 몰리마르(모리발 요셉.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의 유해 안장식을 가졌고, 대전교구 합덕본당도 지난 2005년, 한국전쟁 때 순교한 7대 본당 주임 페랭(백문필.파리외방전교회) 신부와 윤복수(레이문도) 총회장, 송상원(사도 요한) 복사를 위한 순교비를 세웠다.
전주교구에서는 비교적 활발한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가 진행됐다. ‘전주교구사’에는 남원·부안·상관·수류·장수·정읍·신태인본당 등에서 순교한 평신도들의 이름과 나이, 순교 상황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는 이처럼 본당 또는 교구별로 지속돼왔다. 하지만 꾸준히 진행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납치됐다 풀려난 생존자의 증언과 손에 꼽히는 자료만으로 조사된 내용이어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범 교회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의 관심과 물적.인적 지원이 필요하다.
전쟁당시 순교사실을 확인하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기초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기초로 사료집과 증언록을 제작해야 한다. 또 교구 또는 한국교회 전체가 나서 사료집과 증언록에 기초한 순교자 현양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증인들이 대부분 연로하고 자료 또한 전쟁 중 소실돼 어려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전쟁 순교자들이 공산군 점령지였던 서울과 춘천, 대전지역에서 주로 나왔고 순교 시기도 1950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는 것은 순교자 연구 작업을 이 시기, 지역에 맞춰 전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아울러 평신도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도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공산군이 후퇴한 후 주로 공산군 게릴라(빨치산)에 의해 자행된 탄압으로 희생된 평신도 순교자가 100여명에 달하는 전주교구의 경우를 볼 때 3개월 넘게 공산군이 점령했던 서울과 춘천, 대전지역 평신도 순교자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신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아 죽어간 사람들로 여긴 전주교구는 1961년 교구장 명의 공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우리 가톨릭은 다각도로 박해받았고 그 중에는 피살된 교우도 허다하여 실로 역사적인 수난이기도 하였습니다.(중략)… 이들의 거룩한 정신을 찾아 현양하고 신도들에게 순교정신을 앙양시키고자 함과(중략)…우선 살아있는 증인들의 기억이 생생할 때에 가능한 세밀히 조사하여 장차 이 조서가 중요한 의의를 지닐 때에 대비코자 하오니, 각 본당과 공소에 널리 알려 빠짐없는 조사 보고를 무망하나이다.’
46년 전 공문 내용을 거듭 이야기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되돌아보며, 이제라도 한국전쟁 순교자 현양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대전교구사연구소, 순교자 자료·증인 확보 나서
한국전쟁 순교자 연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전교구 대전교구사연구소는 보다 정확한 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위해 한국전쟁 중 사망한 대전교구 지역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당시 행적을 증언해 줄 증인과 관련 자료 소장자들을 찾고 있다. 아래는 대전교구가 현재 조사 중인 순교 성직자와 평신도 명단. 교구사 연구소는 또 전쟁 당시 교구 내에서 벌어진 공산군의 탄압과 순교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찾고 있다.
※ 문의 및 제보 041-556-0166
[성명/직책/체포 날짜 및 순교경위]
·뷜토(오필도)(파리외방전교회)/공세리본당 주임/1950년 7월 성당에서. 1951년 1월 6일 중강진 하창리에서 사망.
·카다르(강달순)(파리외방전교회)/목동본당 겸 수도원 관리/1950년 8월. 1950년 12월 18일 중강진 하창리에서 사망.
·코르데스(공마리오)(파리외방전교회)/당진주임/1950년 8월 14일 이전.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페랭(백문필)(파리외방전교회)/합덕주임/1950년 8월 14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강만수/홍성주임/1950년 8월 15일 이후.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콜랭(고일랑)(파리외방전교회)/서산주임/1950년 8월 16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를뢰(노베드로)(파리외방전교회)/온양주임/1950년 8월 20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리샤르(이동헌)(파리외방전교회)/예산주임/1950년 8월 20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몰리마르(모리말)(파리외방전교회)/금사리주임1950년 8월 20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폴리(심응영)(파리외방전교회)/천안주임/1950년 8월 23일.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윤복수(레이문도)/합덕본당 총회장/1950년 8월 14일 본당주임 페랭신부와 함께 체포. 1950년 9월 29일 당진에서 사망
·송상원(사도요한)/합덕본당 복사/1950년 8월 14일 본당주임 페랭신부와 함께 체포. 1950년 9월 29일 당진에서 사망
·윤갑수(시몬)/예산본당 총회장/윤을수 신부의 형, 합덕본당 윤복수 회장의 사촌. 전쟁 발발 후 피난 중 마을 자유대에 체포. 1950년 9월 27일 총살
·최종수(요한)/공주본당 신자/1950년 7월 14일 전후. 성당에 난입한 공산군 만행 항의하다 성당 마당에서 총살
·이항진(토마스)/대전공업학교 수학교사/공주지역에서 성무활동을 하던 강만수 신부와 동행하다 1950년 8월 15일 전후 체포. 1950년 9월 26일 목동수도원에서 사망
·백낙선(사도요한)/서산본당 상홍리공소 회장/1950년 8월 4일 전후 체포
1950년 9월 12일 서산에서. 공산당 추종자들에 의해 피살
사진섬령
한국전쟁 당시 대전 목동수도원 인근 공터에서는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대전교구 성직자와 평신도를 비롯해 12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사진은 지난 1996년 현장에서 진행된 유골발굴 모습.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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