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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신문]‘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와 근대사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엄(2011년 10월 2일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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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내포교회사연구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237회   작성일Date 23-03-1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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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와 근대사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엄

    “뮈텔 주교, 한국인 영혼 구하고자 노력”

    교구장 임명 후 선종까지 6000여 쪽 일기 남겨

    서울대목구 지도서 간행, 한국사제 양성 강조

    뮈텔 일기, 어지러웠던 근현대사 중요한 사료

    발행일 2011-10-02 [제2764호, 19면]


    1891년부터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부임한 후 42년 간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뮈텔 주교.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사회와 교회를 비추기 위해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9월 23일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3층에서 심포지엄을 열었다.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와 근대사회’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은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뮈텔 주교와 서울대목구 지도서- 한윤식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뮈텔 주교의 대한제국 정국 인식과 정치활동- 김태웅(서울대학교 교수)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최기영(서강대학교 교수) 순으로 진행됐다.




    뮈텔 주교 일기로 본 한국 천주교회


    교구장에 임명된 소식을 접한 1890년 8월 4일부터 선종하기 직전인 1933년 1월 14일까지의 뮈텔 주교 일기는 거의 매일 계속됐다. 분량은 6000여 쪽 정도이며, 교회 안팎의 사건, 조선 사회에서 발생한 주요 정치적, 사회적 사실들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따라서 뮈텔 주교의 일기는 교회사적인 의미뿐 아니라 선교사의 눈으로 본 당시 시대상의 흐름을 짚을 수 있다. 뮈텔 주교가 재임하는 동안 교세의 변화도 컸다.


    1890∼1910년 조선대목구라는 하나의 교구로 1890년대 말에는 간도지역으로까지 확대됐던 그의 관할구역은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 1920년 원산대목구 설정, 1927년 평양지목구 설정 등으로 인해 축소된다.


    특히 일제의 강점이 이뤄진 직후인 1911년부터는 간도로 이민하는 신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는 선교사의 급감으로 현상 유지에 급급한 상황이 됐다. 또한 박해를 겪으면서 다소 높은 신분을 가졌던 천주교 신자들이 하위계층으로 전락했으므로 오지나 도심 외곽지역에 교세가 증가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일기에 의하면 뮈텔 주교가 고해와 견진성사를 주기 위해 방문한 지역은 대부분 읍내나 장터가 아닌 도심에서 먼 지역이었으며, 신자들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빈농이나 옹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여러 가지 계층적 한계는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김정환 신부는 “천주교회가 뮈텔 재임 초창기에도 여전히 하층민들의 종교로 인식되는 계층성의 문제가 있었다”며 “경제·종교적 이유, 계속되는 박해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지면서 도심지역으로까지 확산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1923년 서울대목구 지도서를 간행하며 뮈텔 주교가 강조한 사항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일기에 의하면 신자 교육과 교리교사 교육, 선교사의 정치적 중립, 본당 등록 대장, 한국인 사제 양성 등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선교사의 한국에 대한 이해도 강조했는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 시험을 규정한 것이나, 인내심을 갖고 한국의 음식과 풍속에 적응해 사목활동을 수행하며 한국인들에게 맞출 수 있도록 할 것을 권고했다.


    한윤식 신부는 “뮈텔 주교가 서울대목구 지도서를 반포함에 있어 일본의 한국 강점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 참여에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은 오늘날 민족주의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하지만 뮈텔 주교에 의한 서울대목구 지도서의 간행은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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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 23일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3층에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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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정환 신부가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뮈텔 주교의 행동방향


    조선말 고종정부의 정치적 위기로 서구열강들과 일본의 압박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뮈텔 주교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취약한 선교와 신자들의 신앙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교세를 확장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정치권과 최대한 거리를 두었지만 취약한 여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반독립협회 노선을 걸으며 대한제국 왕실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뮈텔 주교의 당시 이러한 입장과 행동을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김태웅 교수는 “그의 이러한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을 가져오는 동시에 교안의 빈발을 초래했다”며 “하지만 그의 활동방향은 한국인 식자층의 교육계몽운동, 개신교와의 경쟁의식 등으로 대한제국 왕실과 거리를 두며 교육부문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한 발제자는 뮈텔 주교의 이러한 행동이 민족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한국인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한국인의 영원을 구제하는 일이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최기영 교수는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던 시대에 뮈텔 주교는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고자 했다”며 “그것이 바로 한국에 대한 애정의 발현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은 순교자 현양으로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뮈텔 주교 일기에 대한 여러 주제들이 다뤄졌지만 발제자들 모두 뮈텔 주교 일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보였다. 당시 교회 안팎의 사건과 사고, 사실이 자세히 담겨 그 이해를 돕는 중요한 사료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 신부는 “한국 천주교 역사뿐 아니라 근현대사를 살피는 일차적 사료이지만 제대로 주목받지 못해왔다”며 “한말 식민지시대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이번 심포지엄이 자그마한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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