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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신문]대전교구 신평원머리성지 관련 첫 학술 발표회(2011년 12월 18일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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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내포교회사연구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51회   작성일Date 23-03-12 22:40

    본문

    대전교구 신평원머리성지 관련 첫 학술 발표회

    “시복시성 운동 중심지로 적극 개발돼야”

    생매장된 순교자 다수

    한 지역 내 가장 많은 공소·신자 밀집한 공동체

    발행일2011-12-18 [제2775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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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일 신평원머리성지 재조명을 위한 학술행사에서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정환 신부가 신평 지역의 공소사 연구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대전교구 신평원머리성지(담당 황선영 신부)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첫 번째 학술행사가 마련됐다. 대전교구 신평본당은 9일 성당에서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정환 신부 등이 참여한 가운데 ‘당진 원머리 순례지와 신평 교회사’를 주제로 한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발표회에서는 차 박사와 김 신부가 각각 ‘당진 원머리 순교사와 교회사의 의의’, ‘신평 지역 공소사 연구’를 바탕으로 성지 일대 역사와 의의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차기진 박사는 원머리 순교사의 지역적 배경, 내포 천주교회의 확대와 원머리 지역, 원머리 교회사와 병인박해 순교자, 원머리 순교자의 유해 이장 과정 등을 차례로 설명하고 “원머리 순교사의 특징은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이 관변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는 점, 원머리 순교자들이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생매장으로 순교한 경우가 많다는 점, 순교자들의 무덤이 현존하고 있는 성지라는 점 등이다”고 말했다. 차 박사는 또 “이제 원머리 순교자 묘역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공경 운동의 장소요, 이를 위한 순례지로 자리매김 돼야 한다”며 “이러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묘역 단장을 위한 추가작업과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 확보, 시복시성 후 올바른 유해공경을 위한 준비가 이뤄지는 한편, 원머리 생매장 순교자들의 신앙과 생애를 이해하고 그들의 용덕을 본받을 수 있도록 순교사의 시작(원머리)과 끝(홍주, 해미)을 잇는 압송로를 확인, ‘순례자의 길’로 개발하는 것도 좋겠다”고 제의했다.


    김정환 신부는 이번 학술 발표회를 통해 신앙자유기 신평 지역 교회사와 해당 지역 공소 공동체의 특징을 짚어봤다.


    김 신부는 “원머리 일대 신앙공동체가 지닌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박해를 경험한 신자 중 상당수가 다시 모여들어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조선 후기 박해시기를 경험한 내포지방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 이후 공동체가 와해돼 사라지거나 본래 지역에 공동체가 다시 형성되더라도 그 구성원이 바뀐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원머리 일대에는 박해를 피해 이주했던 기존 신자들 상당수가 다시 돌아옴으로써 병인박해 후 30년이 지나지 않아 공동체가 복원됐다. 이후 그곳에 원머리(한정)·새터(매산)·음섬공소가 차례로 설립됐고, 후대에는 맷돌포공소까지 분가해 전국에서 보기 드물게 한 지역 안에 가장 많은 공소와 신자가 밀집한 신앙공동체로 성장했다.


    또한 신앙자유기에 이르러서는 1890년 지역 최초로 합덕본당이 설립됐고, 1960년 신합덕본당, 1975년 신평본당이 설립되면서 원머리·새터·음섬공소는 소속이 바뀌긴 했으나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지역 복음화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평원머리성지는 충청남도 당진군 한정리에 위치하고 있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머리’가 변형된 것으로, 염전과 농사를 주로 짓던 박씨, 양씨, 조씨, 문씨 등이 신앙을 받아들여 병인박해 때에는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됐는데, 현재 한정리(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돼 있는 박태진(마티아)과 박선진(마르코)도 무진년(1868년) 수원 감옥에서 순교했다. 두 사람의 유해는 원머리에 묻혔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성당 내로 옮겨진 바 있으며 2000년 성당 신축과 함께 묘역이 재정비됐다. 아울러 2009년 교구 성지 위원회의 결정과 교구장 유흥식 주교의 재가를 얻어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취지로 같은 해 11월 3일 다시 원머리로 이장됐다.


    이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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